
1990년대 ‘유서 대필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강기훈씨와 가족에게 국가가 6600여만원을 추가로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다만 강씨 쪽이 주장한 검찰 수사 전반의 조작 및 위법성은 인정되지 않으면서 “사건의 본질을 외면한 판결”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서울고법 민사5-1부(재판장 송혜정)는 21일 강씨와 그의 가족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파기환송심에서 “확정 판결된 부분을 제외하고 추가 지급을 명한 금액에 해당하는 원고 패소 부분을 취소한다”며 국가가 강씨에게 5333만원가량을 추가로 배상하라고 밝혔다. 또 강씨의 배우자에게는 500만원, 두 동생에게도 각각 400여만원의 위자료가 추가로 인정됐다. 앞서 확정된 배상액을 포함하면 총 배상액은 10억1300만원가량으로 추산된다. 이번 판결은 대법원이 2022년 11월 ‘장기 소멸시효 규정’을 잘못 적용했다며 원심을 깨고 돌려보낸 지 3년6개월 만에 나왔다. 파기환송심에서 법무부와 대검찰청의 자료 제출 거부로 행정소송까지 벌이게 되면서 재판이 장기화됐다. 강씨는 1991년 서강대학교 옥상에서 분신자살한 고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의 유서를 대신 작성한 혐의(자살방조 등)로 기소돼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하지만 이후 유죄의 결정적 증거였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필적 감정서가 위조된 사실이 인정되면서 2015년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이에 강씨는 국가와 당시 수사 책임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앞서 2심은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검찰의 위법한 조사와 변호인 접견권 침해 등 개별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봤다. 그러나 대법원은 “강씨가 국가를 상대로 수사 과정의 불법 행위를 이유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는 헌재 위헌 결정에 따라 소멸시효를 적용받지 않는다”며 이를 뒤집었다. 이는 헌법재판소가 2018년 “인권침해·조작의혹사건 피해자가 위법한 직무집행에 대해 국가배상을 청구한 경우 소멸시효를 적용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한 데 따른 것이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대법원의 파기환송 취지에 따라 수사 과정에서의 위법한 조사 등 개별 불법 행위에 대한 국가의 추가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다만 1990년대 정국 반전용으로 검찰이 주도해 사건 전반을 조작했다는 강씨 쪽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씨 쪽 공동대리인단은 선고 직후 논평을 내어 “이 사건을 개별 불법 행위에 대한 위자료 문제로만 한정하고, 검찰이 주도한 수사 전반과 공소제기·공소유지의 불법성을 끝내 인정하지 않아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의 본질을 또다시 외면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하나의 목적을 향해 자행된 수사 조작과 개별적 인권 침해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불법 행위”라며 “검찰이 자행한 가혹행위, 증거은폐, 피의사실 공표는 낱낱이 독립된 인권침해가 아니라, 오직 강기훈씨를 유서대필범으로 조작해 내기 위해 동원된 불가분의 수단이자 폭력의 구조 그 자체”라고 했다. 재판부가 개별 불법 행위만을 분리해 판단하면서 수사 전반의 위법성을 외면했다는 취지다. 그러면서 “법원이 이번에도 사건의 전체 실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진실을 기다려 온 피해자와 시민들에게 또 하나의 절망을 남긴 것”이라며 “피해 회복에 대한 의지가 없음을 계속해서 보여준 대한민국의 태도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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