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선거, 참정권 침해, 애국가만 외쳐주세요”가 적힌 대자보 위, ‘만’이라는 글자에는 붉은 ‘×’ 표시가 그어졌다. 그 위로 ‘부정선거’ ‘성조기 가능’ 등의 문장들도 덧대어 적혔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항의하며 시작된 ‘개표소 봉쇄’ 시위가 나흘차에 접어든 8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을 울린 구호는 “부정선거 재선거”였다. 전날 부정선거 음모론과 선을 그으며 “재선거”만을 구호로 삼았던 분위기가 하루 만에 반전한 것이다. 이날 핸드볼경기장 앞에 모인 이들은 수천명 수준으로, 1만여명이 밀집했던 전날에 견줘 다소 줄었다. 다만 시위는 한층 격앙된 모습이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든 한 30대 여성 참가자는 “더불어민주당이 원하는 게 ‘재선거’인데 답답하다. 부정선거로 가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참가자는 “어차피 언론은 우리를 ‘극우’로 프레임 씌우는데 중도에 눈을 맞출 필요가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날까지 ‘외연 확장’을 꾀하며 부정선거론과 선을 긋던 이곳 시위 양상이 돌변한 것은, 이런 주장이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등 진보 단체의 노림수라는 인식이 번진 탓이다. 대진연이 부정선거론과 개표소 시위를 분리하기 위해 현장 분위기를 ‘조종’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 이날 시위 현장 곳곳에는 ‘부정선거 입막음 지령, 대진연 선동 조심!’, ‘여러분, 부정선거 외쳐도 됩니다’ 등이 적힌 종이가 나붙었다. ‘선관위에 계엄군 보낸 사람 누구? 윤석열’ 등 ‘윤어게인’ 주장을 담은 문구도 보였다. 과격한 행동도 다시 포착됐다. 시위 참여자 일부는 이날 오전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대한체육회 직원과 여자 핸드볼 주니어 대표팀 선수 등의 출입을 막거나, “프락치 아니냐”며 소지품을 검사했다. 이 과정에서 “(투표용지를 숨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양말도 벗겨야 한다”는 발언까지 나와 경찰이 제지했다. 이들이 참여한 온라인 대화방 등에는 현장 경찰을 ‘중국인’으로 의심하는 황당한 글도 지속됐다. 경찰청은 이날까지 시위 과정에서 경찰 5명이 경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온 청년들도 다시 ‘음모론’으로 향하는 시위 분위기를 우려했다. 지난 5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비판하는 성명을 냈던 고려대 총학생회 중앙비상대책위원회의 이지민 위원장은 “이번 문제는 보수와 진보를 떠나 국민의 기본권과 참정권 침해 문제로 접근해야 할 사안”이라며 “극단적 주장으로 논의가 흘러갈 경우 처음 청년층이 문제를 제기한 취지와 의도가 훼손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연우 서강대 총학생회장도 “시험 기간이 겹치면서 현장을 지키던 청년층이 빠져나간 자리를 정파적 목적을 가진 세력이 채우면서 집회의 성격이 변질된 측면이 있다”며 “에스엔에스(SNS)에서는 극단적 요소 위주로 집회 관련 정보가 퍼져나가는데, 집회 자체가 오염됐다는 식으로 비치며 자칫 정치 혐오로 번질까 우려스럽다”고 했다. 한편 경찰은 6·3 지방선거 관리 부실 문제와 관련해 선관위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 관계자는 “선거 종사자 대화방 확보와 선거 사무에 동원된 공무원, 용지 부족으로 투표하지 못한 시민, 인쇄업체 조사 등 관련 수사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날 노태악 선관위원장 등을 직무유기 및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한 시민단체 관계자에 대한 고발인 조사도 벌였다. 선거무효 소송 등에 대비한 구체적인 움직임도 시작됐다.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던 김정철 개혁신당 최고위원은 이날 서울동부지법에 투표함과 투표지, 투표록 등에 대한 증거보전을 신청했다. 증거보전이 인용되면 담당 법관은 향후 소송에 쓰일 때까지 증거물을 봉인해 별도의 장소에 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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